정부재정

[*이글은 Youtube channel “전주성 교수의 개랑경제학에 실린 내용입니다] 

https://youtu.be/5Dtn9ntAOZM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취임한지 불과 44일 만에 사임했다. 1980년대의 보수혁명을 상징했던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를 롤 모델로 지난 9월 23일, 취임 2주만에 내놓은 대규모 감세안이 금융시장을 혼란에 빠트리며 역효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는 정치이념에 기반한 설익은 정책, 시장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정책이 얼마나 나쁜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사건 전개를 간단히 요약해보자. 영국 정부는 소득세 최고세율을 45%에서 40%로 낮추고, 법인세율 인상 계획(19%에서 25%로)를 철회하는 등 약 450억 파운드(약 73조원)에 달하는 대규모 감세안을 내놓으면서 이것이 초래할 수 있는 구조적 재정적자에 대한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가뜩이나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 같은 악재에 흔들리던 영국 금융시장은 혼돈에 빠졌고 급기야 영국 국채의 투매와 파운드화의 폭락이 이어졌다. 당황한 영국 중앙은행이 650억 파운드(약 100조원) 규모의 돈을 풀어 국채매입을 하기로 선언했지만, 이는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며 금리를 올리고 있는 기존의 긴축통화 기조와 상반되는 것이라 시장의 불안감은 멈추지 않고 있다.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이 서로 충돌하고, 정책 일관성마저 흔들리면서 영국 정부의 신뢰도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여기에다 영국 연기금들이 국채가격 급락에 따른 담보가치 하락에 대응하기 위해 해외자산을 팔면서 영국 사태는 세계 금융시장 불안으로 이어졌다.

통상 재정적자는 국채를 발행해 그 재원을 마련한다. 만일 감세정책으로 소비나 투자가 살아나 성장이 촉진되면 세금도 더 걷히고 적자의 부작용도 크지 않을 수 있다. 이론적으로 가능한 얘기다. 하지만 이런 논리가 현실에서 먹힐 지는 특정 시대와 국가가 처한 정책환경과 정부의 정책능력에 달려있다.

40년 전인 1981년의 레이거노믹스는 최고 소득세율이 70%, 법인세율이 46% 수준이던 ‘큰 정부’에 대한 반동의 성격이 강했다. 정부가 세금은 많이 거두어 가는데 경제 성과는 신통치 않으니까, 차라리 세금을 깎아주어 시장과 민간 주체의 역할을 강화하는 편이 낫다는 보수 진영의 주장에 힘이 실린 것이다. 

당시 기준으로 GDP의 3%에 달하는 대규모 감세를 시행했는데, 이때에도 재정적자에 대한 논쟁이 치열했다.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레이건은 감세와 함께 지출 삭감을 약속했지만 이를 믿는 전문가는 많지 않았다. 지출구조조정이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군비지출이 늘어나며 적자폭은 더 커졌다. 

재정적자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자 레이건 정부는 래퍼커브(Laffer curve)라 불리는 개념까지 동원했는데, 이는 지나치게 높은 세율 하에서는 세율인하가 경제활동을 촉진해 조세수입이 오히려 증가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결과적으로 이 논리는 틀린 것으로 입증됐고 이후 미국은 몇 차례 증세를 통해 구조적 재정적자를 해소할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아무리 감세의 긍정적 효과가 크다고 해도 이로 인한 구조적 재정적자의 발생에 대해서는 반드시 신뢰할 만한 대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레이거노믹스가 남긴 중요한 교훈 중 하나이다. 

그런데 영국 트러스 행정부의 감세정책에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한 둘이 아니다. 우선 지금은 1980년대와 정책환경이 크게 다르다. 필자의 저서 <재정전쟁> 5장에서 강조했듯 현실에서 정부크기를 좌우하는 것은 집권당의 정치이념이 아니라 시대조류나 세수기반이다. 1980년대는 큰 정부에서 작은 정부로 가는 시기였지만, 지금은 다시 ‘큰 정부’로 향해가고 있다. 불평등이나 인구 고령화에 대처할 복지지출, 기후변화나 에너지 안보를 위한 환경지출, 탈세계화 조류에 편승한 전략산업 투자 등 구조적 정부지출이 늘 수밖에 없는 시기이다.

이럴 때 대규모 감세를 하면 재정적자에 대한 우려가 커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코로나 사태의 여파로 영국의 재정상태는 정부부채가 GDP의 150%를 넘을 정도로 악화된 상태다. 트러스 총리의 감세정책에 시장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파운드화의 국제 위상이 높으면 적자재원의 일부를 해외자본으로 조달할 수도 있다. 미국의 경우 국채의 절반은 외국자본이 사준다. 달러화가 핵심 국제결제통화(Reserve currency; 기축통화) 이기 때문이다. 세계경제가 불안하면 국제 자본은 더욱 더 안전한 피난처(Safe haven)를 찾는다. 영국의 파운드화도 19세기나 20세 초반까지만 해도 이런 위상을 가졌지만 지금은 아니다. 파운드화는 감세정책 이전에도 달러 대비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감세로 재정적자 리스크가 커지며 영국 국채가격 하락이 예상되자 시장에서 영국 국채와 파운드화 투매가 시작된 것이다.  

나아가, 감세나 규제완화와 같은 공급측면의 정책을 편다고 무조건 생산성이 늘고 성장률이 높아지지 않는다. 인적자원이나 기술수준, 성장 인프라가 받쳐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지금의 영국은 금융자본주의 시대의 빅뱅(Big bang; 금융규제완화)으로 경제가 살아나다가 브렉시트(Brexit)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다. 인구는 늙어가고, 제조업 기반은 녹슬어가는 환경에서 감세정책 하나만으로 대단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시장은 판단하지 않을 수 있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한 마디로 자국이 처한 정책 환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레이건이나 대처 시대의 보수혁명 향수에 젖어 무모한 정책을 시도한 측면이 커보인다.  

나아가 정책을 주도하는 정부의 신뢰도 역시 문제다. 투명성이나 일관성 없는 정책은 경제주체의 신뢰를 받기 어려워 정책 효과가 떨어진다. 이런 중요한 정책을 제대로 된 논의나 검증도 없이 총리 취임 2주만에 급격하게 시행한 것이다. 밀실에서 급조된 불투명한 정책은 시장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나아가 시장이 흔들리니 국채를 팔려다 오히려 국채를 매입하는 식의 일관성 없는 정책을 펴고 있다. 그래도 사정이 나아지지 않으니 감세정책을 일부 철회하고 재무장관을 교체하는 등의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정부 신뢰는 더욱 떨어졌다. 

한마디로 시대흐름을 읽지 못하는 무능한 정책집단이 자신들의 정치이념이나 내세우며 밀실에서 만들어낸 정책의 말로는 비참했다.

잠시 한국 상황을 보면, 보수정당이 집권을 하고 법인세 인하를 예고하고 있다.  한국과 영국의 정책환경이 동일하지는 않지만, 인플레이션, 환율문제, 경기침체 등 공통적인 변수가 적지 않다.  당장의 재정 상황은 우리가 나아 보이지만 정책능력, 정치실종, 대통령 지지도, 가계부채 등 우리가 경계해야할 요인도 적지 않다. 남의 실수를 보고 배우는 것도 중요한 능력이다. 그러러면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부터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서울 거리에는 ‘태극기 대 촛불’ 같은 왜곡된 정치 패싸움 밖에 보이지 않는다. (10/2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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